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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3 린타이 | 나비 날개의 비 (蝶羽の雨) 01
- 2014.07.05 린타이 | 존재역설의 자메뷰
※ 공정회고도시 AU
(일부 고증이 틀린 부분이 있을지도)
※ 씨씨→타이렐 요소 있습니다
증기라는 여러 겹의 흰 장막으로 둘러 싸인 그 높고 텅 빈 공간을 그는 아직 하늘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제 별도 구름도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아 이미 하늘이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 했지만, 여전히 그 곳은 하늘임이 분명했고 이곳은 그 하늘을 부유하는 공정도시였다.
공정도시라 함은, 해수면이 상승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육지가 줄어들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자연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부유하는 거대한 기계의 섬. 이곳은 육지를 대신해 사람들이 생활하고, 어느 날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 어느날은 그 생명이 죽어가는 삶의 터전이 되어갔다.
타이렐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지금까지 자라 온 어엿한 공정도시의 주민이었다.
그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헤어져버린 부모의 행방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는 부모의 품이 아닌 다른 어떤 시설에서 자라왔다. 고아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은 공정도시의 동력을 담당하는 연료가라는 공정도시에서 가장 열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공정도시를 바다 위 하늘에 떠 있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구 시대 부터 쭉 이어오던 방식인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꿈의 동력이자, 마법의 힘처럼 여겨지는 이 화석연료도 사실은 완벽하게 아름답거나 환상적이지 못했다. 그것을 태워 나오는 증기는 독성을 갖고 있었다. 독성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뇌를 파고들어,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지워져 버린 대상은 다시 상대를 알게 되더라도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잊어버리게 된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그것은 이 공정도시의 안개와 같이 만연한 질병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멜랑콜리아. 인간 간의 관계를 갉아먹는 이 질병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병이 진행 된 이후에는 자신이 그 병에 걸렸다는 자각조차 없어져 연구는 진행되는 일 없이 흐지부지 되는 일이 잦았고, 그렇다고 연료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니 결국에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
타이렐이 그의 부모와 헤어지게 된 것은 그가 겨우 다섯 살 때. 부모의 존재는 기억하지만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멜랑콜리아 때문이 아닌, 단순히 부모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적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타이렐은 증기에 노출이 심한 연료가 근처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20살이 된 지금까지 멜랑콜리아에 걸리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홀로서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며 누군가 의지할 생각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타이렐 본인은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은 그러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핬다.
그는 현재 서쪽의 연료가와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한 기관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연구하는 것은 멜랑콜리아에 대한 것이나, 앞으로의 이 공정도시의 생태계획에 대한 것 등등 기타 잡다한 여러가지. 일단 의료·의학 이라는 문패를 내걸었으니 의사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가벼운 아르바이트라 생각하고 들어 와 지금까지 일한 것이 곧 3개월. 꽤나 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는 아직도 알 지 못했다. 그러면서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 정체불명이지만 안정적인 이 일터를, 타이렐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3개월 째 성실하게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이곳의 직원은 그를 포함해서 단 세명이다. 이 작은 연구소의 (사무실에 가깝지만) 소장인 리니어스라는 이름의 남자와, 타이렐이 이 곳에 오기 전 부터 이곳에서 일 하고 있던 C.C.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여자가 그 일원이었다.
특이하긴 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사람들 속에서 타이렐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연구소의 소장인 리니어스는 살짝 다리를 절었지만 언제나 웃음을 짓고 있는, 소위 말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처음 이곳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처음보는 그에게 권유를 한 것도 그다. 이렇다 할 직업없이 한량 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를 리니어스가 발견한 것이었다.
타이렐은 나름 자신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정체를 모를 시설에서 길러졌다는 것만을 제외하곤 자신이 받은 교육도 당시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고, 그 자신의 자존심 또한 상당히 높았다. 그가 아무런 직업도 얻지 못했던 것은 낮출 줄 모르는 그의 눈높이가 문제였다. 리니어스는 그런 타이렐이 마음에 들었는 지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꾀어냈고, 타이렐은 그 감언이설에 속아 지금 이곳에 근무하게 된 것이 되겠다.
타이렐이 이곳에서 하는 일은 연료를 태워 나오는 증기의 성분과 멜랑콜리아에 대해 연구 및 조사를 하는 것, 가끔 연료가에서 오는 연락을 받고 그들의 기계를 고쳐주는 정도의 일이었다.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이래뵈도 증기에 노출이 심한 일이다 보니 보기보다 꽤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정도 일한 만큼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의. 하지만 타이렐은 차라리 돈을 못 벌 지언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미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더욱 싫었다. 자신은 의미있는 존재이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르는 바른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멜랑콜리아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기피하는 일, 증기를 다루는 일을 타이렐은 아무 스스럼 없이 대했다. 그가 증기의 독기에 강한 체질이었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그는 멜랑콜리아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잊혀질까 두려운 사람도 없었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것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은 혼자이고 자신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는 자신 뿐이었다. 그렇게 날이 서 있는 타이렐을 받아준 것은 리니어스 뿐 이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게 된 것일까.
리니어스와 처음 만난 날도 오늘 처럼 비가 왔다. 가끔씩 이 공정도시에 비가 오는 날이면 배수가 원활하지 않은 곳은 공중임에도 물에 잠기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독립하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던 그의 거처도 이번 비에는 물이 들어차고 말았다. 점심 때 쯤 되어 그의 이웃이 전한 그 비극적인 소식에 타이렐은 도시에 드리워진 스모그의 구름처럼,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타이렐이 괜찮다면 집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 까지 저희 집에 있어도 되니까요…?"
C.C.가 그의 기분을 풀어 보려 했지만 오히려 화만 돋구는 꼴이 되었다.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습니다만. C.C.의 호의에 대한 타이렐의 대답이었다. C.C.도 의도는 좋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져 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던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는 데다가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 자체를 그닥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렐이 차갑게 쏘아 붙이자, C.C.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할 일로 돌아갔다.
"타이렐, 오늘 따라 업무 성과가 안나오네에. 좀 더 일에 집중해줘어."
리니어스의 말에 대충 '네에', 하고 대답한 타이렐은 그제서야 책상 한쪽에 쌓여있던 서류 무더기 중 한 무더기를 가져와 천천히 분류를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니 오늘은 전원 실내에서 서류 업무를 하기로 하고, 일이 끝 날때 까지 사무실에는 유례없는 정적이 흘렀다. 보통 때라면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은 타이렐 뿐, 리니어스와 C.C. 둘이서 만담에 가까운 잡담을 나누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끔 타이렐에게 대화를 유도했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일이 모두 끝난 것은 평소보다 4시간 빠른 오후 네시.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간만에 일찍 일이 끝나서 그런지 C.C.는 평소 보다 더 들뜬 듯한 모습이었다. 비가 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집에 가면 무엇을 하고 놀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무언가 망상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생각만으로 그렇게 즐거울 수 있는지 타이렐은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 C.C.를 먼저 보내고 남은 남자 두명은 대충 사무실의 정리를 하기로 했다.
하늘은 여전히 감색의 구름으로 뒤덮여 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아."
"그러게요."
이 의미없는 대화는 그와 리니어스의 대화의 기본형이다.
타이렐은 리니어스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깝지. 나름 자신의 은인이기도 하고 직장 상사이기까지한 그를 싫어 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일반적이지 못한 경우다. 그런데도 그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가 저렇게 쌀쌀맞게 되는 것은 본인도 모르게 멜랑콜리아라는 그 마음에 생기는 병을 신경쓰고 있기 때문인 것 일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의식하고 싶지도 않은 그의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자신이 걸리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남이 걸리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 쓰이니까.
빗줄기는 점점 약해져가고 있었지만 타이렐의 걱정은 이제부터였다. 물에 잠겨버린 집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 비도 그치지 않았고, 어느정도 물이 빠져야 정리를 하고 물건을 정리하지 무작정 그 작업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적어도 사흘은 필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은 어디에서 잠을 자야할까. 이웃집에 도움을 청하기에는 타이렐의 집도 침수당했는데 그들의 집이 잠기지 않았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C.C.의 집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직장 동료고, C.C.가 경계심 없는 성격이라고 해도 사귀지도 않는 사이의 두 남녀가 며칠 동안이나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그의 양심이 판단했다. C.C.의 제안을 거절 한 것은 절대로 C.C.가 싫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하지만 거절하고 나니 막상 오늘 밤 잘 곳이 문제다. 근처에는 호텔 같은 것도 없고 곤란하다. 내일은 출근도 해야하고, 또 며칠 간 묵기에도 애매하다. 돈은 충분히 있어도 헛되이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타이렐의 고민을 알아차린 리니어스가 타이렐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라도 잠깐 있을래애?"
"아니… 제가 왜요."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아. 타이렐은 소심하니까 C.C.의 집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테고."
"잠깐만요! 소심하다니 그게 뭡니까! 왜 제가 소심하다고 단정짓는거죠?!"
자신의 성격에 대해 지적받은 타이렐이 소리쳤지만 리니어스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모양이다. 리니어스는 그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뒷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집이라면 타이렐도 편하게 있을 수 있을 테고, 괜찮지 않아아?"
여기에서 한 번 자존심을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그냥 호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잠깐 고민했지만 여기서 더 이상 거절 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리니어스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죠."
타이렐의 새침한 대답이 리니어스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리니어스의 집은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연료가 근처 주택의 수준이라고 해 봤자 대부분 비슷비슷하지만 이런 비에 물이 들어차 버린 타이렐의 숙소보다는 확실히 좋은 곳이다.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아. 내 집처럼 생각해도 좋아."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 폐를 끼치고 싶진 않네요. 실례하겠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베란다에 놓여있는 수 많은 화초 화분들이었다. 크기도 제각각이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곤충의 박제들이다. 한쪽 벽면에 드문드문 걸려 있는 나비의 박제들에 큰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리니어스가 이런 취미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을 둘러 보고 있는 타이렐에게 리니어스가 말한다.
"비에 젖었는데 일단 먼저 샤워 할래? 난 나중에라도 좋아아. 타월 준비 해 둘테니까. 옷은 내거라도 빌려줄게에."
리니어스의 옷이 저에게 맞을까요, 입 밖으로 나올 뻔 했지만 무시하는 것 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 참았다. 지금은 리니어스의 호의에 순수하게 감사하자.
욕실에 들어가 타이렐은 옷을 벗었다. 빗물과 땀이 뒤섞여 말라 붙어버린 몸이 찐득찐득하다. 잠시 거울을 보며 멍하니 있는 타이렐에게 문 너머 리니어스가 말을 걸어온다.
"그러고보니 오늘 기분이 많이 안좋아 보이던데 지금은 괜찮아아?"
"글쎄요. 나쁘진 않네요."
"타이렐이 기분이 좋아졌다니, 나는 기쁘지이."
기분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뭐 괜찮으려나. 타이렐은 리니어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피식, 하고 웃었다.
리니어스는 계속해서 문 너머의 타이렐에게 말을 건다.
"그거 알아? 타이렐. C.C.도 나도 타이렐을 무척 좋아하고 있는 거. 그러니까 가끔씩은 타이렐도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어. 나 까진 아니더라도 C.C.정도는."
오늘따라 두 사람이 말이 없던 것은 그를 의식하고 있던 것이다. 뭐 그런 쓸 데 없는 배려를.
타이렐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고작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인 주제에 쏟아지는 소리는 대찬 빗소리와 비슷하다. 차가운 물이 몸 위로 쏟아졌다. 생각보다 물의 온도가 너무 차갑다. 수도꼭지의 방향을 온수 쪽으로 살짝 조정하였다. 얼어 붙을 정도로 차갑던 물이 뜨끈미지근한 물로 변하고, 욕실 안은 옅은 수증기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비가 자주 내려 주면 좋을텐데. 공기중에 떠다니던 독성 물질이 씻겨 내려가기도 하고. 나무나 꽃들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아."
자신보다 작은 키를 가진 이 사람은 항상 그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 길가의 꽃이라던가, 벌레라던가. 공정도시에선 보기 힘든 지상에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그것을 그리워 하는 것일까, 동경하는 것일까. 타이렐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타이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공정도시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 대체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것일까. 물어보았지만 그는 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서 살다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운 좋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따금씩 이처럼 지상에 대한 향수를 갖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가 지상에서 살다 이주할 정도라면 (당시 그런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 뿐이었다) 상당히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거나, 정치적 요직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렐은 그의 과거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은 적이 없었다. 어째서 다리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을 하기 전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따금 중요한 용건이 있다며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 중 그를 '학장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공정도시에서 살아가는 것 일까. 타이렐은 그 질문을 그대로 자신에게 옮겨 보았다. 나는 왜 이곳에서 살아가는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원시적인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에 무언가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인정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라는 존재가 최고가 되고싶다. 그것이 단순하지만 그의 삶이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의 초점을 리니어스에게로 바꾸어, 리니어스가 이 공정도시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서 연료가 근처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타이렐이나 C.C. 같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일까.
"리니어스 씨."
"으응?"
샤워기의 물을 잠시 끄고, 타이렐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멜랑콜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타이렐이 먼저 그 화제에 대해 꺼내는 건 처음이네."
"가끔은 변화도 필요한 법이죠."
잠시 동안 리니어스는 말이 없었다.
"타이렐이 나를 잊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는 리니어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리니어스 씨가 저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리니어스 씨를 잊어버릴 리는 없을테니."
"하하, 그런가. 그럴 일은 없을테니 걱정하지마, 타이렐."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하긴 했어도 멜랑콜리아라는 기억의 병이 만연한 이 공정도시에서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상대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그 사람를 잃어버린다는 것.
이 곳의 사람들은 함부로 마음을 줬다 잊어버릴까, 잊혀질까 두려워 함부로 친해지지도, 사랑을 할 수도 없었다.
리니어스의 그 상냥함은 그런 멜랑콜리아에게 있어 독과 같을지 모른다. 멜랑콜리아가 지워버리는 기억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의 기억이라면 아마 리니어스는 그 상냥함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된 뒤 다시 수 없이 잊혀졌을 것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물론 전부 타이렐의 추측이지만 아주 없을만한 일도 아니다.
그는 이미 멜랑콜리아에 걸려 있는 상태일까. 이런 상냥한 사람이 잊어버리게 된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멜랑콜리아는 한 사람에게 한 번 발병하면 다시 발병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누군가를 잊어버리게 된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을 잊어버릴 수 없다. 자신을 의지했고, 자신이 의지한 상대가 하나 씩 자신을 잊어버려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어떨까. 자신이 멜랑콜리아에 걸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자신이 그 사람에게 부은 애정의 양에 대해 의심을 하진 않았을까. 아, 저 사람이 나에게 할애한 감정의 양 만큼 나는 저 사람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게 후회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C.C.나 타이렐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번 만큼은 잊혀지기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샤워기의 물을 껐다. 남의 과거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다. 망상이 지나쳤다. 설령 그의 추측이 맞다 하더라도 그와는 상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나 리니어스가 서로를 잊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서로를 그 정도까지 소중하게 여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타이렐에게 있어 멜랑콜리아는 큰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급하게 몸에 거품을 묻혀 씻어 냈다. 너무 오랫동안 욕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곳은 자신의 집이 아닌 남의 집이다. 괜한 폐를 끼친게 아닐까 걱정이다. 욕실의 문을 살짝 여니 수건과 잠옷이 놓여 있었다. 물기를 닦고, 수건으로 허리를 감싸고, 분홍빛이 드는 잠옷을 들어 올려보았다. 얼추 사이즈는 맞는 것 같았다. 그런 것보다 이런 건 어디에서 구한 것 일까. 같이 사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둔 것이라면 대단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옷을 갈아입고 욕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리니어스는 베란다에 서서 창 틀에 올려 놓은 작은 화분의 화초가 빗물에 젖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오면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오늘의 비는 그가 리니어스와 만나게 된 날 이후로 처음 내리는 비였다.
+
상중하로 하려했는데 장편이 될것같다
괜찮아요 언라이트는 평생장르니까 그때까진 끝나겠죠
※거의 창작세계관 수준의 AU 주의
※무언가의 짧은 프롤로그
이제 그것은 어느 정도 익숙해 진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 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익숙해지는 쪽이 이상한 일인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동시에 무척이나 슬픈 일이 될것이다.
세상은 커다란 태엽시계이고, 자신들은 그것을 이루는 톱니바퀴중 하나라고 생각해오던 타이렐이었다. 아주 작은 부품 하나라도 빠지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타이렐이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삐걱거리긴 해도 문제 없이 잘 돌아가기만 했다. 그랬던 세상이 갑자기 재정비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것이 바로 사건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톱니바퀴가 고장이 난다면, 그것을 교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 그 교체당한 톱니바퀴가 자신이었다는 것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타이렐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그를 볼수도, 기억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투닥거리던 동료도, 마음에 들지 않던 상사도, 뭔가 뒤가 구린일을 하던 관계자들도,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타이렐' 이라는 사람의 존재와 그가 있었던 흔적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가 이뤄낸 얼마 없는 성과들은 전부 다른 사람이나, 우연의 산물로 인한 발견으로 변해있었고, 그가 만든 것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억울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슬픔을 알아 줄 수 있는 것은 본인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투명인간이었다. 벽과 벽 사이를 통과 할 수만 없을 뿐이지, 이 존재감은 그야말로 투명인간이다.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다. 자신은 분명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래선, 그가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조차도 알아낼 방법이 없겠다. 일단 그래도 여러가지 가설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케이오시움에 의한 일 이라는 가설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없다.
아직도 이곳에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니,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사람들이 몰래 실험을 하고 있었기에 그 타깃으로 자신이 선택된 것이 아닌가. 이런 선택따위는 받고싶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곳 저곳, 의심이 가는 곳을 찾아 다녔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이 세계를 조정한 그 사람만큼은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조사를 하는 것은 쉬웠다. 오히려 서두르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없어도 이 세계는 잘 돌아가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처음부터 그가 그 곳에 끼워져있던 톱니바퀴가 아니었던 것 처럼. 오히려 이전, 자신이 있던 과거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아웃사이더. 이곳에서도 존재 할 수 없고 완벽히 사라질 수도 없는 그런 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잭오랜턴 처럼.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자신과 겹쳐보였다. 눈앞에서 아른 거리는 환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저어도, 처량하게 등불을 들고 다니는 자신의 환영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곤한 모양이다. 타이렐은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도 잊을 수 있게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았을텐데. 화가 나는 동시에 무척이나 슬퍼졌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따지고 물어, 이 상황을 해결 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유일한 돌파구가 막힌 기분이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심장은 충분히 젖어있었다. 슬픔의 눈물이기 보다는, 분을 이길 수 없어 땀처럼 맺친 눈물이었다.
성과 없이 그저 같은 곳을 맴돌기만 몇 시간 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무력감에 그가 점점 시들어 갈 때, 누군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타이렐, 여기서 뭐해애?"
이런 상황에도 그닥 반갑지 않은 그 목소리는 그의 상사인 리니어스 상급 엔지니어였다.
어떻게 자신이 보이는 것일까. 왜 하필 자신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인가. 이 사람이 이 상황을 초래한 것인가. 케이오시움의 연구에 손을 댈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타이렐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진 않은 상대다.
"그렇게 보지 말고, 타이렐. 무섭잖아."
"당신이 저를 무서워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가아. 뭐, 사소한 거에 신경쓰지 말고. 아까전의 질문,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나 대답해 줄래애?"
타이렐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 더욱 사소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사의 요구는 웬만해선 거절하지 말자는 것이 타이렐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흐음~ 그렇구나아."
그리고 정적. 리니어스와 타이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사람과 계속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 타이렐이 먼저 등을 돌렸다.
"타이렐."
그가 등을 돌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리니어스가 말했다.
"무슨일이시죠."
"음, 그냥 아무것도 안물어보나 해서. 타이렐 군은 자신이 처한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는 건가. 궁금해진 것 뿐이니까."
"물어볼만한 기력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과 대화하면 그 기력이 더욱 빨려나가는 기분입니다. 당신은 분명히 의심스럽지만 쉽게 물어 볼 수가 없군요. 물어봐도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리니어스는 만면에 미소만을 가득 띄우고 있다.
"타이렐은 뭔가, 나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마. 오히려 너에게 있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구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당신이 꾸민 일입니까?"
이런 것이 무엇인지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타이렐은 그가 모든 것을 꾸몄다는 확신 아래, 그렇게 말했다.
"꾸몄다니, 그런 악당같은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단지 지금은 조정 중 일 뿐이니까아."
세상이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이야기를 처음에 말했었지. 리니어스가 타이렐의 마음을 읽는 듯이 말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톱니바퀴라고 한다면, 타이렐은 바로 그 세상에 초대 받지 않은 부품이었다. 처음부터 이 기계에 끼워질 수 없는 부품 중 하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존재였을 수도 있고,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던 사람 일 수도 있다. 리니어스는 그 부품을 주워 어떻게든 이 시계에 끼워넣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왜 그라는 존재에 눈을 뗄 수 없었는지. 단순히 미지의 존재에 대한 탐구 정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리니어스가 원래는 있을리가 없는 존재를 세계에 존재시키고, 그 이후로는 계속 그가 그를 이 곳에 있게 했다. 그가 있기에 타이렐이 존재했다. 타이렐이 기억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이 현상은 그에게 몇번이고 일어났던 일이었다. 항상 옳음을 추구하던 타이렐이지만 그라는 존재 자체는 불안정 그 자체기에, 몇번이고 지금과 같은 조정기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항상 조정기간이 끝나면 그 동안에 있던 일은 하룻밤 꿈처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걸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 없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습지도 않는 장난은 그만해 주세요."
"믿지 않아도 타이렐에게는 큰 영향은 없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어. 너에게는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고. 어차피 금새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 될 테니까."
리니어스는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타이렐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바로 내가 그걸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 계속 너를 붙잡고 있는 거지만."
또 다시 생각을 읽는 듯한 말투로, 리니어스가 대답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타이렐을 독점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둘 만의 시간이네. 기념비적이야."
연극의 오프닝 멘트 같은 과장된 어투로 그가 말한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파악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그런 시간은 평생 주어지지 않겠지.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 타이렐."
리니어스의 목소리와 함께, 괘종시계의 울림소리가 들렸다. 아침 9시를 알리는 시계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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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제목은 슈타게 챕터명에서 따왔습니다 아마 계속 따올듯 중2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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