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무로가 그 곳에 가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항상 같이 다니던 후배, 무라사키바라와 함께 간식을 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늘 보던 거리에서 그날따라 이상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타로카드 카페인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은 좀 더 본격적으로 점을 봐주는 점집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런 장소에 스스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런 종류의 카페에 대해 반 여학생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종종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곳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관심이었는데. 그가 그 곳에 이상하게 관심이 갔던 직접적인 이유는 보란 듯이 크게 매달아 놓은 팜플렛의 문구였다.
소원을 이루어 드립니다. 단, 소원에 따른 약간의 대가가 따릅니다. 약간의 대가라는 것은 돈을 말하는 것일까. 결국 장사라는 것이 그렇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시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을 들으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소원을 이뤄준다는 것일까. 그 옆의 무라사키바라도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같이 한 번 들어가 볼까? 하고 물어보니, 그러자고 말한다. 남학생 둘이서 이런 수상한 점집이라. 기분이 미묘하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일단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보라색과 검은색위주의 인테리어와 촛불. 굳이 점집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멋진 실내였다. 카페도 겸하고 있으니, 가끔씩 들려도 괜찮을 것 같다. 실내에는 점을 보는 장소와, 카페로 이용하는 공간이 따로 나뉘어 있었다. 음료수나 디저트를 두 개 이상 주문하면 타로 점 한 번은 공짜로 볼 수 있는 듯 했다. 일단 무라사키바라는 파르페, 히무로는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고. 히무로는 점을 보는 공간의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곳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일반 타로 점 등을 보는 방, 그리고 소원을 이루어 주는 방이었다. 히무로는 당연히 소원을 이루어주는 방에 들안에 들어가 보려했지만, 이미 그 안에는 그 보다 먼저 소원을 빌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히무로는, 그 사람이 나올 때 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러 오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무슨 바람을 이런 것에 의존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반 장난인 것일까. 방 안에는 로브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앉아있었다. 오호라, 이런 컨셉이구나. 그 괴상한 옷차림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책상을 하나 사이에 두고, 히무로는 그 사람의 앞에 앉았다. "정말로 소원을 이뤄주시는 건가요?" 히무로가 앉자마자 그것부터 물어본다. 솔직히 히무로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그런 마법사 같은 사람은 존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뤄드립니다. 그에 따른 대가만 치룬다면요." 기나긴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소원을 비는 항상 무언가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도 모르는데. 시험 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그 때 그만두면 되는 것이다. "제 소원은, 제가 다른 누구도 범접 할 수 없을 만한 압도적인 재능을 갖는 것 입니다." 일부러 히무로는 그가 빌 수 있는 최대한의 소원을 빌어보았다. 동시에 그가 포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 소원은 이루어져도 그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당신에겐 이미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사람이 말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뛰어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연습해왔다. 수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얻었지만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더 이상 발전 할 수가 없다. 다가갈 수 가 없는 것이다. 그가 도달하고 싶은 천재의 벽은 그야말로 무한대다. 쥐어짜듯이 노력하여 겨우겨우 도착했다 싶었더니 다시 저만큼 멀어져있다. 그 천재라는 벽 너머에 있는 그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고 질투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도 그런 재능이, 그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회에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는 소원을 빌 것이다. "이 소원 말고는 빌고 싶은 소원이 없어서요. 설마 소원을 이뤄줄 수 없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히무로가 도발적으로 물어보았지만, 그 사람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애매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감정 중 하나를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감정일지는 저도 모릅니다. 무작위죠." 수많은 감정 중에 딱 한가지의 감정, 그것을 가져가는 대신 어떤 소원이던 들어준다니,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닌까. 이 사람은 그에게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신 그의 감정 한 가지를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가져가는 감정은 무작위라고 한다. 어라, 이거 수지맞는 장사가 아닐까. 하지만 만약 가져가는 감정이 기쁨 같은 것이라면 자신은 영원히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 두렵지만, 어차피 무작위니 다른 감정을 가져갈 확률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다. 눈을 잠깐 감고 있었더니, 모든 의식이 끝났다며 이제 나가보라고 한다. 어라, 이게 끝? 마법 같은 연출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나도 평범하다. 혹시 이 사람, 싸이코가 아닐까.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그것으로 희열을 느끼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히무로에게 이제 끝났으니 어서 가보라고 손짓한다. 히무로가 방을 나와 보니, 문 앞에는 무라사키바라가 있었다. "무로칭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나 파르페 다 먹었고." "아, 여기 점을 보는 공간에서 한 번 해봤어. 소원 빌기." "결국엔 빌었어? 어떤 소원?" "그건 아츠시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은걸. 어차피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도 거짓말일지도 모르고." 무라사키바라가 흐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히무로는 원래 그들이 있던 자리에 돌아가서,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다. 식어버린 커피는 차의 의미가 없다. 단지 쓴 물일 뿐이다.
그 카페에서 돌아온 다음 날 부터, 히무로에게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사소한 것이었다. 넣을 수 있는 슛의 비거리가 조금 늘어난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히무로 본인만이 발견했던 것 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바랐던 재능의 싹일지도 모른다. 히무로는 그렇게 생각했고, 평소보다 더욱 노력했다. 원래부터 연습은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연습량을 더욱 늘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와서 더 늦게 연습을 마쳤다. 그렇게 며칠, 이 정도의 연습량이 점점 익숙해졌을 무렵, 처음으로 하프코트에서 던져보았던 슛이 골에 들어갔다. 본인이 넣은 슛인데도 본인이 놀랐다. 이대로라면 곧 있을 윈터컵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히무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좋아했다. 처음으로 출전하는 대회에서 주목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재능이라는 것은 단순한 능력 뿐 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재능을 가진 사람에겐 지금의 실력보다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없는 사람은 그것이 없다는 것이고. 히무로는 예전부터 그것이 싫었다. 자신의 한계선을 그어버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는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자신이 누군가보다 약하거나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위해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었는데. 타고난 사람들만큼은 이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람은 절망한다. 히무로도 그랬다. 이미 한 번의 절망을 맛 본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절망을 다시 맛 볼 필요가 없다. 재능에 관련해서, 괜찮다고, 극복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위로해도 남아 있던 찝찝함이, 이제는 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에게 없던 재능이 나타난 것이라면,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고 싶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재능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그때는 궁금해 하지 못했다. 그의 재능이 갑자기 개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1학년과 2학년의 정기적인 교류전에서였다. 그가 여름에 갑자기 전학을 왔었을 때도 그는 분명히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뛰어났었다. 기적의 세대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느낌 자체가 달랐다. 2학년 팀은 다른 팀원들이 있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히무로 혼자서 점수를 얻어냈고, 1학년 팀은 무라사키바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점을 계속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방어 실패로 무라사키바라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 경기에서 2학년 팀은 84:23의 점수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눈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보자, 히무로는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그 천재라고 불리던 무라사키바라를 이기다니, 이게 꿈은 아닐까. 이 천하의 무라사키바라를 이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생각을 하니 우쭐해졌다. 항상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에게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히무로는 경기가 끝난 뒤에 웃으면서 평소와 똑같이 농구 부원들을 챙겼지만, 다른 누구도 그를 예전과 같은 히무로 타츠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아마 그 때부터 히무로 타츠야는 변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까지 쌓여왔던 울분과 열등감, 그리고 그러면서도 높았던 자존심. 따로 존재 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재능이라는 소스를 더하게 되면서, 그것이 자만심과 무시로 드러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재능이 그때의 소원으로 얻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지만, 이제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없어진 감정이 대체 무엇일까. 지금까지는 딱히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무슨 감정이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으니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가볍게 넘어갔다. 그렇게 다시 몇 주 간, 히무로의 능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기적의 세대와 겨뤄도 쉽게 이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팀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히무로 때문이었다. 상냥하고 성실한 노력파인 농구부 선배의 캐릭터는 거의 붕괴한 것 같았다. 겉으로는 성실하게 연습도 참여하고 후배들을 챙겨주는 것 같았지만 은근히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히무로 본인도 알고 있었고 모두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겨우겨우 균형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건드리면 곧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균형은 히무로 타츠야 본인이 붕괴해 버렸다. 윈터컵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이었다. 잠깐 연습을 쉬면서, 1학년의 연습을 봐 주고 있던 히무로에게 한 남학생이 눈에 띄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못해서 눈에 띄었다. 그래도 농구에 대해 애정이 있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감독도 다른 부원들도 마음에 들어 하던 학생이다. 하지만 히무로는 이상하게, 그 모습이 거슬렸다. 그 날은 테스트가 있던 날이었다. 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은 2군은 1군으로, 3군은 2군으로 올라가는데, 이 학생은 이번에도 3군에서 올라가지 못했다. 티는 안내려고 노력하지만 역시 속상해 하는 것 같다. 히무로는 그 학생에게 가서 말했다. 평소에 그가 사용하던 상냥한 말투 그대로. "재능 없으면 그냥 그만 두지 그래? 아니면 연습해서 그나마 있는 재능이라도 끌어올리던가, 그것도 못하면 넌 단순히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무라사키바라가 이 말을 듣고 하던 연습을 멈추고 히무로를 바라본다.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히무로가 이상해지긴 했어도, 저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저런 말은 무라사키바라의 입에서 나와야 자연스럽다. 히무로가 오기 전에도 몇 번 저질렀고, 중학교 때도 그랬다. 지금의 히무로의 모습이 자신과 겹쳐보였다. 왠지 모르게 역겨웠다. "히무로, 말이 너무 심하다." 근처에 있던 다른 3학년선배가 히무로에게 말했다. 히무로는 그 말에,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심하다니요, 저는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인데요." 히무로의 그 한 마디에, 구장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조용해 졌다. 왜 이러는 거지. 히무로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여러분들도 이러고 있을 틈이 있다면 어서 연습해 주세요. 노력하면 언젠가 보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걸 생각하고 연습에 전념해주세요." 늘상 지어보이는 미소가 왠지 모르게 소름끼친다. 노력하면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다. 히무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하던 히무로의 눈은 그래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으면서. 자신은 아무리 해도 안 된다면서, 울면서 발악하던 것이 자신이면서. 하지만 지금의 히무로에게는 그런 말은 통할 것 같지 않다. 왠지, 그때의 히무로와 지금의 히무로를 이어주는 무언가의 조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결국 히무로에게 그 말을 들은 3군의 학생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다른 학생 몇 명이 그 학생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고, 무라사키바라가 히무로에게 다가왔다. “무로칭,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이런 무로칭 나 처음 보는 것 같고.” “그냥, 나도 내가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한 것뿐이야.” “뭐,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무라사키바라가 눈동자만 돌려 히무로를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무로칭 이상해졌어. 진짜로 이상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걸, 아츠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이상하다고? 이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얻고 싶던 재능과 능력을 얻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대단한 낭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생겼는데 그것을 과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건 이전까지 이어져오던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그런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왔는데. 그리고 무라사키바라, 그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갑자기 재능이 생긴 그와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으면서도 지금의 그와 비슷한 태도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가. "내가 아는 무로칭은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은 안 해." "항상 사람이 똑같을 수는 없잖아? 같은 상황이라도 행동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변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그저 유치한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항상 누군가를 올려보다, 그들을 내려 볼 수 있는 입장이 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것이 자신이 과연 할 일인가. 의문이 들긴 한다. 하지만, 이 재능은 그가 정당히 노력해서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히무로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까같이 약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생각이나 화가 난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무로칭이 무로칭이 아닌 것 같아. 예전에도 짜증났는데 더 짜증나졌어. 더러워." “더러운 것이 누군데. 그렇게 말하는 아츠시가 더 더러워.”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고 간접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동시에 도발이다. 타고난 사람은 모를 것이다. 더럽고 추하게 바닥을 기면서 무언가를 갈망하던 사람이 갈망하던 것을 얻었을 때 보이는 추태를. 게다가 이것은 거의 그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나빠? 히무로는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히무로는 지금, 어쩌면 자신의 재능을 단지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허영심과 열등감을 채워 넣을 무엇인가의 도구로만. 이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행동을 했을까? 무언가 계속, 허무한 기분이 든다. 어째서일까. 재능이 생긴다면 무엇이든지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자신감도 회복하고 그때보다 더 훌륭한 선배이자, 친구이자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 반대였다. 물론 재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 권력이나 능력을 갖게 된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변해버리는 걸까. "사람들은 전부 무로칭이 대단하다고, 완벽하다고 말하지만 내 눈엔 전혀 아니야. 오히려 뭔가가 사라진 기분이고." 무라사키바라가 차가운 눈으로 히무로에게 묻는다. "무로칭… 농구 하는 거, 아직도 좋아해?" 무라사키바라의 그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히무로였다. 예전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말했을 질문인데 왜 이렇게 어색한 것일까. 자신은 여전히 농구를 좋아하는 걸까. 그렇다고 분명히 말할 수가 없다.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조각들 중 어떤 감정 한 조각만이 잘려나간 것 같았다. 더 이상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느꼈다. 그 날 히무로는 감독에게 상담을 받았다. 감독은 히무로에게 요즘 연습으로 힘든 일은 없냐고 물어보았다. 전혀 그런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감독은 요즘 히무로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얘기한다. 결국에 이 사람도 똑같은 얘기만 반복한다. 본인이 이상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다들 왜 이러는 것일까. 감독은 히무로에게 커피를 타 주었다.싸구려 인스턴트 커피였다. 감독은 자신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 한다. 최근의 히무로에게는 농구에 대한 애착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저 의무적으로 농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혹시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 그렇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전부 그에 대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히무로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감독의 배려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에는 어서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나태한 생각 뿐 이었다.
요센 고교는 그 해 윈터컵, 전 시합 무실점이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기고 우승했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무라사키바라는 농구를 그만 두었다.
전혀 좋지 않았다.
히무로가 재능을 얻는 대신에 잃어버린 감정은, '좋아한다' 는 감정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지워버린 것인가는 알 수가 없었다.
"카가미 군이 죽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소년, 쿠로코 테츠야가 히무로 타츠야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아, 그랬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히무로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치곤, 그는 전혀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그것도 한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의 사망소식을 들었는데도 그의 태도는 평소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 차분했다. 카가미는 이제 없지만 이런 히무로의 행동을 그가 보게 된다면,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쿠로코 본인이 화가 난다. 저 태도는 적어도 죽은 사람에 대한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일단은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쿠로코가 질문한다. "히무로 씨는 안 오시는 겁니까?" "오다니, 어디를." "카가미 군이 있는 병원 말입니다." 히무로의 대답은 매정하다. "가지 않을거야. 어차피 죽은 사람에게 잘 보일 이유는 이제 없으니까." 죽은 사람은 필요 없다는 것인가. 이 말을 들으니 이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쿠로코도 히무로가 말하는 것처럼, 매몰차게 그에게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이제 끊겠습니다. 실례가 많았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쿠로코는 전화를 끊었다. 뚜-뚜- 전화를 끊었을 때 나오는 익숙한 소리가 머리에서 왱왱거린다. 실제로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소리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같다. 계속 뇌 내에서 빙글빙글,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어지럽다. 이건 위험 경보다. 카가미 타이가가 죽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도 와 닿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히무로 타츠야 본인이 바로 그 죽음의 산 증인이었다. 당시 시각은,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였던 것 같다. 히무로는 카가미와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먼 거리에서 그를 발견했었다. 반대편 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오고 있는 카가미를 발견한 히무로는, 어차피 이대로 가면 만날 것 같은데, 무시하고 그냥 가야할까, 가서 인사를 해야 할까 잠깐 멈춰 서서 생각했다. 고민하던 순간에 카가미가 빠른 속도로 돌진하던 트럭에 부딪혀 날아가 버렸다. 신호등은 분명히 초록 불이었는데. 엄연한 차량 측의 과실이다. 카가미는 정확히 말하자면 트럭에 부딪혀 날아간 것이 아니라 날아온 것이었다. 그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부터 히무로가 서 있는 반대편 도로의 앞까지. 육안으로는 어디를 다친 건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피는 분명히 나고 있었다. 튕겨 날아오듯이 했으니, 아마 몸 어딘가가 부러진 것이 아닐까. 잉크병이 엎어진 것처럼 붉은 액체가 그의 몸과 도로에 천천히 퍼지고 있다. 쓰러진 카가미의 몸은 마치 관절이 고장난 인형 같았다. 그런 카가미를 보고 히무로에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기쁘다'는 이름의 환희였다. 사고의 최초 신고자는 히무로로, 그는 전화에서도 그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정말로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정신 상태는 안정되어보였다. 신고 전화에서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있는 곳의 주소와 지금 상황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상황 진술을 위해 경찰서에 갔을 때도 히무로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상태로 사고를 봐서 정신이 없으니 나중에 이야기하고 싶다는 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의 태도는 도무지 지인이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본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사고를 당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경찰은 히무로를 그냥 보내주었다. 나중에 사고 상황에 대한 설명을 받기 위해 다시 부를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리고 몇 시간 후, 카가미의 친구 중에선 가장 먼저 카가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받은 쿠로코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히무로가 카가미를 그 상황에 만나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근처의 대학에 입학하고 도쿄에서 살게 되었다. 적당히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보니 이곳까지 이르렀다. 사실은 도쿄로 이사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는 카가미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때는 이사를 간다는 결정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사실 히무로 타츠야는 예전부터 카가미가 무척이나 불편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색하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문제였다. 그는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가미가 그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지금까지 그것이 이어져 왔다. 히무로는 그의 앞에서는 항상 상냥한 형으로 있어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도 한계였다. 미국에서 처음 만나 농구를 가르쳐주고 그것으로 친해졌다. 하지만 히무로는 금세 깨닫고 말았다. 이 녀석에게 재능으로는 이길 수 없다. 가르쳐준 것은 자신인데. 결국엔 자신이 몇 수나 더 아래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질투심을 웃는 얼굴 아래에서 계속 삭혀두고 있었다. 카가미가 처음으로 히무로를 이기게 되었을 때도 카가미가 일부러 실수를 하여 그 둘의 승부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을 때도 같았다. 삭혀둔 질투는 어느새 인가 증오로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카가미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거짓으로 화해를 받아준 것이 아직도 그를 괴롭히던 때. 카가미가 그의 눈앞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카가미의 환영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웃고 있는 그의 환영이 히무로에게 '네가 날 죽인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카가미가 죽고 난 지 사흘 후. 장례식도 아마 지금쯤이면 끝났을 것이다. 카가미의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이제는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을까. 카가미가 죽고 난 사흘 동안 계속 꿈에서 그가 나타났다. 꿈의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꿈속의 두 사람은 그저 한 없이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너는 사라졌는데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걸까. 분명히 잘라내 버린 부분이 아직까지 아프다.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며 히무로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신이 했던 행동은 과연 최선의 행동이었을까. 후회 아닌 후회가 밀려온다. 카가미가 죽은 지 5일이 되는 날 그의 앞에 쿠로코가 나타났다. 어깨에는 커다란 가방까지 매고 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것일까. 집 주소 같은 걸 알려 준 적은 없는데. 그보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와 히무로는 그다지 큰 접점이 없었다. 그나마 카가미를 통해서 얕게나마 이어져 있었을 뿐 그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어울릴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면 지금 상황에선 한 가지밖에 생각 할 수 없다. 카가미와 관련된 일이겠지. 그런 일로 만나는 거라면 사양이다. 히무로는 쿠로코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도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쿠로코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닫히려하는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해서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인걸까. 쿠로코가 히무로의 눈을 응시하며 말한다. "카가미 군의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더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와 주실 줄 알았는데." "실망 시켜서 미안. 하지만, 별로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어." "그렇습니까. 히무로 씨는 생각 외로 세상을 편하게 사는 편이었군요." 편하게 산다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지금까지 그는, 계속 괴로워해왔다. 자신의 진심과 겉으로 표현하는 자신에 대한 괴리에. 지금껏 고통받아가며 힘겹게 살아왔는데. 뭔가 울컥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맞춰 움직이는 융통성을 보일 수가 없었다. 보통이라면, 싫어하는 감정을 꾹꾹 눌러서라도,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가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쿠로코가 말한다. "히무로 씨와 카가미 군의 관계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히무로 씨는 카가미 군이 그렇게 싫습니까?" 히무로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쿠로코는 계속해서 준비된 말을 꺼낸다. "카가미 군도, 사실은 히무로 씨의 고통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제가 상황을 어느정도 파악 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을 해 주었으니까요. 물론 사고가 있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재능이란 것은 정말로 불공평합니다. 그것에 대한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재능이 없어서 절망 하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죄는 없습니다. 히무로 씨가 잘못한 것도, 카가미 군이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운이 나빴던 것뿐이죠. 이런 말을 하기엔 매정하지만, 이것에 대한 문제는, 히무로 씨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문제이니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요." 언뜻 들어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는 것 같지만, 히무로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히무로에게 카가미를 이해해 줄 것을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카가미를 대신해서, 화해를 부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에게 남은 카가미에 대한 키워드는 질투와 증오다. "난 한 번도 카가미 타이가를 용서한 적이 없어." 사실은 계속, 계속 미워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 녀석의 재능을 눈치 챘던 초등학생 때부터, 처음으로 지게 되었던 중학생 때, 그리고 고등학생 때 다시 만나 또 다시 질 때까지, 그리고 화해하자고 그가 먼저 히무로에게 다가왔던 그 순간까지도, 히무로는 카가미를 도저히 용서 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속에선 칼을 갈고 있었다. 이기적인 생각이다. 어째서 자신은 재능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하였는지, 재능이 있는 저 녀석은 내가 먼저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 재능이라는 것이 있는 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능이 있는 주제에 그에게 살갑게 대하는 그 태도가 오히려 구역질났다. 그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건 오히려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재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오히려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후의 시합에서, 누가 봐도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기회에서 일부러 실수를 하여 히무로를 봐주었다.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자존심이 다시 산산조각이 나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부 잊어버리고 싶었다. 저주스러웠다. 매일매일 카가미 타이가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누구에게 빌었는지는 본인도 알 수 없지만, 그 소원 아니 원망을 비는 것은 그에게 있어 지극히 익숙한 것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소원이었다. 그만큼 농구를 잘하게 해달라는 소원이나 오늘은 그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소원이나. 그런 단순한 바람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가 망가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이라던가 자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려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소원. 하지만 그것 중에서 이루어진 소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히무로가 바라던 소원은 점점 더 추악하고, 음습한 무언가로 변해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찍었던 카가미와의 사진을 하나 씩 망가뜨려 가기 시작했던 것은 그 때부터였다. 빨간색과 검은색 펜으로 그의 얼굴을 지우고, 나중에는 그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찢어버리고, 나중에는 태워버렸다. 카가미를 생각하며 자해를 할 때도 있었다. 이 고통을 그녀석이 느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카가미와 싸웠던 그 날, 다음 시합에는 형제의 증표이자 추억의 상징을 걸자고 말했던 그 날 히무로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둘의 사진에서 카가미의 얼굴만을 도려냈다. 그 때의 사진은 항상 지니고 다니고 있다. 자신도 그게 무슨 의도 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죽으라고, 죽어버리라고 소리 지르며 미친 듯이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도 마음은 전혀 편안하지 못했다. 카가미 타이가가 죽게 해주세요. 내 눈앞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제발. 그는 카가미 타이가라는 존재를 자신의 인생에서 잘라 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기뻤다. 오랜 시간동안 간절히 바라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웃지 않으면 안 되지. 하하하. 웃어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것은 차가운 숨 뿐 이다. 신고를 하고, 히무로는 그 자리를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 주변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자신의 표정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제대로, 기쁜 표정으로 보이고 있을까. 정신을 차릴 때 쯤, 구급차가 왔다. 표정은 송장처럼 굳어 무표정이되었다. 사이렌 소리가 왜앵 왜앵 신경을 찢어놓는 것 같다. "카가미 타이가는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그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다. 항상 그의 죽음을 바랐다. 직접 죽인 것은 아니어도 그의 죽음에 한 몫,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죄책감일까. 그것은 아니다. 약간의 슬픔, 그리고 아쉬움. 아마 미련이라고 하는 것 일거다. 이 미련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라질 수 있을까. "아마, 이 자리에 카가미 군이 있었더라면 히무로 씨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히무로 씨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쿠로코가 그 말을 마친 순간 히무로는 카가미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히무로의 착각이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것은 쿠로코였다. 그를 카가미로 착각하다니, 자신은 아직도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가. 카가미가 아직 자신의 곁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쿠로코는 본론을 이야기하겠다며 매고 온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아마도 카가미의 유품 정리를 도왔던 것 같다. 사고 당시 갖고 있었던 소지품 중에서 무언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을 가져 왔겠지. "히무로 씨에게 전할 게 있습니다. 카가미 군의 품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피가 묻어서 거의 알아볼 순 없지만, 쿠로코가 건넨 것은 사진이었다. 히무로와 카가미가 함께 찍혀있는 사진이었다. 기분 나쁘게 이런 것을 왜 갖고 다녔던 것일까. 자세히 보니 히무로가 갖고 있는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히무로의 사진은 카가미의 얼굴이 비어있고, 대조적으로 카가미가 갖고 있는 사진은 핏자국으로 히무로의 얼굴만이 가려져있었다. 두 장의 더러워진 사진이 어딘가 병들어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가미 군은 단 한 번도 히무로 씨를 얕잡아보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어요."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 카가미는 그를 좋아해 주었고 존경했다. 진심으로. 오직 히무로, 그 혼자서만 그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이다. 히무로에게 카가미는 미칠 듯이 증오스러웠던 동시에, 소중한 동생이었다. 모순적이다. 모든 미련의 근원인 모순이었다. 그의 모든 것이 부러워 질투하고 증오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결국 다시 이 사람에게 끌리고 있었다. "히무로 씨,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쿠로코가 히무로에게 손을 내밀어 한 가지 물건을 더 쥐어주었다. 주먹을 꽉 쥐어도, 쥐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버린 그것은 피 묻은 싸구려 은반지였다. 이제는 손가락에 들어가지도 않아 아무런 쓸모가 없는 반지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 일까. 일단 받아들고 나니 그때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그 은반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은반지를 아직도 목에 걸고 있었다는 것을. 쿠로코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다시 한 번만 카가미 군을 만나고 와 주세요."
다음날, 히무로는 교외에 있는 작은 납골당으로 갔다. 어울리지 않게 흰 국화꽃도 몇 송이 사들고 갔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두개 들어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흉물스러운 사진들이다. 카가미가 죽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카가미는 죽었다.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상관이 없다는 것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존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이 미련은 무엇인가. 눈엣가시 같던 사람이 사라졌는데, 그의 생각 속에 가시처럼 박혀 스칠 때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 드디어 없어졌는데. 누가 죽고 누가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저기 작은 항아리에 담겨 있을 카가미의 뼛가루가 마치 그 자신인 것 같다. 이번에도 히무로는 그에게 져버렸다. 이긴 적이라곤 한 번도 없다. 결국 그는 그가 가장 싫어했던 카가미 타이가가 없어졌어도 그에게 남은 미련 때문에 아마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 것이다. 패자의 인생이다.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 아무도 없는 납골당에 우뚝 서 있던 히무로가 무너져 내린다. 그는 원래부터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겹게 지키고 있었던 것뿐이다. 모래성과 다를 것이 없다. 만들고 지키는 것은 힘들지만 결국에는 부서지기 쉬운 모래일 뿐이다. 히무로는 소리 없이 울었다. 품에 있는 국화 꽃다발을 안고 울었다. 희디 흰 국화 꽃잎에는 물인지 눈물인지. 물방울이 하나 맺혀있다.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뼛가루에게 히무로가 망연히 속삭인다. "너도 조금은 나를 원망해도 좋아. 타이가."
증기라는 여러 겹의 흰 장막으로 둘러 싸인 그 높고 텅 빈 공간을 그는 아직 하늘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제 별도 구름도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아 이미 하늘이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 했지만, 여전히 그 곳은 하늘임이 분명했고 이곳은 그 하늘을 부유하는 공정도시였다.
공정도시라 함은, 해수면이 상승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육지가 줄어들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자연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부유하는 거대한 기계의 섬. 이곳은 육지를 대신해 사람들이 생활하고, 어느 날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 어느날은 그 생명이 죽어가는 삶의 터전이 되어갔다.
타이렐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지금까지 자라 온 어엿한 공정도시의 주민이었다.
그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헤어져버린 부모의 행방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는 부모의 품이 아닌 다른 어떤 시설에서 자라왔다. 고아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은 공정도시의 동력을 담당하는 연료가라는 공정도시에서 가장 열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공정도시를 바다 위 하늘에 떠 있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구 시대 부터 쭉 이어오던 방식인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꿈의 동력이자, 마법의 힘처럼 여겨지는 이 화석연료도 사실은 완벽하게 아름답거나 환상적이지 못했다. 그것을 태워 나오는 증기는 독성을 갖고 있었다. 독성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뇌를 파고들어,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지워져 버린 대상은 다시 상대를 알게 되더라도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잊어버리게 된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그것은 이 공정도시의 안개와 같이 만연한 질병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멜랑콜리아. 인간 간의 관계를 갉아먹는 이 질병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병이 진행 된 이후에는 자신이 그 병에 걸렸다는 자각조차 없어져 연구는 진행되는 일 없이 흐지부지 되는 일이 잦았고, 그렇다고 연료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니 결국에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
타이렐이 그의 부모와 헤어지게 된 것은 그가 겨우 다섯 살 때. 부모의 존재는 기억하지만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멜랑콜리아 때문이 아닌, 단순히 부모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적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타이렐은 증기에 노출이 심한 연료가 근처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20살이 된 지금까지 멜랑콜리아에 걸리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홀로서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며 누군가 의지할 생각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타이렐 본인은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은 그러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핬다.
그는 현재 서쪽의 연료가와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한 기관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연구하는 것은 멜랑콜리아에 대한 것이나, 앞으로의 이 공정도시의 생태계획에 대한 것 등등 기타 잡다한 여러가지. 일단 의료·의학 이라는 문패를 내걸었으니 의사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가벼운 아르바이트라 생각하고 들어 와 지금까지 일한 것이 곧 3개월. 꽤나 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는 아직도 알 지 못했다. 그러면서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 정체불명이지만 안정적인 이 일터를, 타이렐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3개월 째 성실하게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이곳의 직원은 그를 포함해서 단 세명이다. 이 작은 연구소의 (사무실에 가깝지만) 소장인 리니어스라는 이름의 남자와, 타이렐이 이 곳에 오기 전 부터 이곳에서 일 하고 있던 C.C.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여자가 그 일원이었다.
특이하긴 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사람들 속에서 타이렐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연구소의 소장인 리니어스는 살짝 다리를 절었지만 언제나 웃음을 짓고 있는, 소위 말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처음 이곳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처음보는 그에게 권유를 한 것도 그다. 이렇다 할 직업없이 한량 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를 리니어스가 발견한 것이었다.
타이렐은 나름 자신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정체를 모를 시설에서 길러졌다는 것만을 제외하곤 자신이 받은 교육도 당시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고, 그 자신의 자존심 또한 상당히 높았다. 그가 아무런 직업도 얻지 못했던 것은 낮출 줄 모르는 그의 눈높이가 문제였다. 리니어스는 그런 타이렐이 마음에 들었는 지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꾀어냈고, 타이렐은 그 감언이설에 속아 지금 이곳에 근무하게 된 것이 되겠다.
타이렐이 이곳에서 하는 일은 연료를 태워 나오는 증기의 성분과 멜랑콜리아에 대해 연구 및 조사를 하는 것, 가끔 연료가에서 오는 연락을 받고 그들의 기계를 고쳐주는 정도의 일이었다.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이래뵈도 증기에 노출이 심한 일이다 보니 보기보다 꽤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정도 일한 만큼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의. 하지만 타이렐은 차라리 돈을 못 벌 지언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미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더욱 싫었다. 자신은 의미있는 존재이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르는 바른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멜랑콜리아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기피하는 일, 증기를 다루는 일을 타이렐은 아무 스스럼 없이 대했다. 그가 증기의 독기에 강한 체질이었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그는 멜랑콜리아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잊혀질까 두려운 사람도 없었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것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은 혼자이고 자신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는 자신 뿐이었다. 그렇게 날이 서 있는 타이렐을 받아준 것은 리니어스 뿐 이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게 된 것일까.
리니어스와 처음 만난 날도 오늘 처럼 비가 왔다. 가끔씩 이 공정도시에 비가 오는 날이면 배수가 원활하지 않은 곳은 공중임에도 물에 잠기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독립하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던 그의 거처도 이번 비에는 물이 들어차고 말았다. 점심 때 쯤 되어 그의 이웃이 전한 그 비극적인 소식에 타이렐은 도시에 드리워진 스모그의 구름처럼,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타이렐이 괜찮다면 집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 까지 저희 집에 있어도 되니까요…?"
C.C.가 그의 기분을 풀어 보려 했지만 오히려 화만 돋구는 꼴이 되었다.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습니다만. C.C.의 호의에 대한 타이렐의 대답이었다. C.C.도 의도는 좋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져 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던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는 데다가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 자체를 그닥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렐이 차갑게 쏘아 붙이자, C.C.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할 일로 돌아갔다.
"타이렐, 오늘 따라 업무 성과가 안나오네에. 좀 더 일에 집중해줘어."
리니어스의 말에 대충 '네에', 하고 대답한 타이렐은 그제서야 책상 한쪽에 쌓여있던 서류 무더기 중 한 무더기를 가져와 천천히 분류를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니 오늘은 전원 실내에서 서류 업무를 하기로 하고, 일이 끝 날때 까지 사무실에는 유례없는 정적이 흘렀다. 보통 때라면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은 타이렐 뿐, 리니어스와 C.C. 둘이서 만담에 가까운 잡담을 나누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끔 타이렐에게 대화를 유도했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일이 모두 끝난 것은 평소보다 4시간 빠른 오후 네시.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간만에 일찍 일이 끝나서 그런지 C.C.는 평소 보다 더 들뜬 듯한 모습이었다. 비가 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집에 가면 무엇을 하고 놀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무언가 망상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생각만으로 그렇게 즐거울 수 있는지 타이렐은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 C.C.를 먼저 보내고 남은 남자 두명은 대충 사무실의 정리를 하기로 했다.
하늘은 여전히 감색의 구름으로 뒤덮여 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아."
"그러게요."
이 의미없는 대화는 그와 리니어스의 대화의 기본형이다.
타이렐은 리니어스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깝지. 나름 자신의 은인이기도 하고 직장 상사이기까지한 그를 싫어 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일반적이지 못한 경우다. 그런데도 그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가 저렇게 쌀쌀맞게 되는 것은 본인도 모르게 멜랑콜리아라는 그 마음에 생기는 병을 신경쓰고 있기 때문인 것 일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의식하고 싶지도 않은 그의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자신이 걸리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남이 걸리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 쓰이니까.
빗줄기는 점점 약해져가고 있었지만 타이렐의 걱정은 이제부터였다. 물에 잠겨버린 집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 비도 그치지 않았고, 어느정도 물이 빠져야 정리를 하고 물건을 정리하지 무작정 그 작업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적어도 사흘은 필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은 어디에서 잠을 자야할까. 이웃집에 도움을 청하기에는 타이렐의 집도 침수당했는데 그들의 집이 잠기지 않았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C.C.의 집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직장 동료고, C.C.가 경계심 없는 성격이라고 해도 사귀지도 않는 사이의 두 남녀가 며칠 동안이나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그의 양심이 판단했다. C.C.의 제안을 거절 한 것은 절대로 C.C.가 싫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하지만 거절하고 나니 막상 오늘 밤 잘 곳이 문제다. 근처에는 호텔 같은 것도 없고 곤란하다. 내일은 출근도 해야하고, 또 며칠 간 묵기에도 애매하다. 돈은 충분히 있어도 헛되이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타이렐의 고민을 알아차린 리니어스가 타이렐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라도 잠깐 있을래애?"
"아니… 제가 왜요."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아. 타이렐은 소심하니까 C.C.의 집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테고."
"잠깐만요! 소심하다니 그게 뭡니까! 왜 제가 소심하다고 단정짓는거죠?!"
자신의 성격에 대해 지적받은 타이렐이 소리쳤지만 리니어스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모양이다. 리니어스는 그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뒷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집이라면 타이렐도 편하게 있을 수 있을 테고, 괜찮지 않아아?"
여기에서 한 번 자존심을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그냥 호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잠깐 고민했지만 여기서 더 이상 거절 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리니어스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죠."
타이렐의 새침한 대답이 리니어스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리니어스의 집은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연료가 근처 주택의 수준이라고 해 봤자 대부분 비슷비슷하지만 이런 비에 물이 들어차 버린 타이렐의 숙소보다는 확실히 좋은 곳이다.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아. 내 집처럼 생각해도 좋아."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 폐를 끼치고 싶진 않네요. 실례하겠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베란다에 놓여있는 수 많은 화초 화분들이었다. 크기도 제각각이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곤충의 박제들이다. 한쪽 벽면에 드문드문 걸려 있는 나비의 박제들에 큰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리니어스가 이런 취미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을 둘러 보고 있는 타이렐에게 리니어스가 말한다.
"비에 젖었는데 일단 먼저 샤워 할래? 난 나중에라도 좋아아. 타월 준비 해 둘테니까. 옷은 내거라도 빌려줄게에."
리니어스의 옷이 저에게 맞을까요, 입 밖으로 나올 뻔 했지만 무시하는 것 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 참았다. 지금은 리니어스의 호의에 순수하게 감사하자.
욕실에 들어가 타이렐은 옷을 벗었다. 빗물과 땀이 뒤섞여 말라 붙어버린 몸이 찐득찐득하다. 잠시 거울을 보며 멍하니 있는 타이렐에게 문 너머 리니어스가 말을 걸어온다.
"그러고보니 오늘 기분이 많이 안좋아 보이던데 지금은 괜찮아아?"
"글쎄요. 나쁘진 않네요."
"타이렐이 기분이 좋아졌다니, 나는 기쁘지이."
기분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뭐 괜찮으려나. 타이렐은 리니어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피식, 하고 웃었다.
리니어스는 계속해서 문 너머의 타이렐에게 말을 건다.
"그거 알아? 타이렐. C.C.도 나도 타이렐을 무척 좋아하고 있는 거. 그러니까 가끔씩은 타이렐도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어. 나 까진 아니더라도 C.C.정도는."
오늘따라 두 사람이 말이 없던 것은 그를 의식하고 있던 것이다. 뭐 그런 쓸 데 없는 배려를.
타이렐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고작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인 주제에 쏟아지는 소리는 대찬 빗소리와 비슷하다. 차가운 물이 몸 위로 쏟아졌다. 생각보다 물의 온도가 너무 차갑다. 수도꼭지의 방향을 온수 쪽으로 살짝 조정하였다. 얼어 붙을 정도로 차갑던 물이 뜨끈미지근한 물로 변하고, 욕실 안은 옅은 수증기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비가 자주 내려 주면 좋을텐데. 공기중에 떠다니던 독성 물질이 씻겨 내려가기도 하고. 나무나 꽃들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아."
자신보다 작은 키를 가진 이 사람은 항상 그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 길가의 꽃이라던가, 벌레라던가. 공정도시에선 보기 힘든 지상에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그것을 그리워 하는 것일까, 동경하는 것일까. 타이렐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타이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공정도시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 대체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것일까. 물어보았지만 그는 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서 살다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운 좋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따금씩 이처럼 지상에 대한 향수를 갖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가 지상에서 살다 이주할 정도라면 (당시 그런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 뿐이었다) 상당히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거나, 정치적 요직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렐은 그의 과거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은 적이 없었다. 어째서 다리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을 하기 전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따금 중요한 용건이 있다며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 중 그를 '학장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공정도시에서 살아가는 것 일까. 타이렐은 그 질문을 그대로 자신에게 옮겨 보았다. 나는 왜 이곳에서 살아가는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원시적인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에 무언가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인정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라는 존재가 최고가 되고싶다. 그것이 단순하지만 그의 삶이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의 초점을 리니어스에게로 바꾸어, 리니어스가 이 공정도시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서 연료가 근처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타이렐이나 C.C. 같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일까.
"리니어스 씨."
"으응?"
샤워기의 물을 잠시 끄고, 타이렐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멜랑콜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타이렐이 먼저 그 화제에 대해 꺼내는 건 처음이네."
"가끔은 변화도 필요한 법이죠."
잠시 동안 리니어스는 말이 없었다.
"타이렐이 나를 잊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는 리니어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리니어스 씨가 저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리니어스 씨를 잊어버릴 리는 없을테니."
"하하, 그런가. 그럴 일은 없을테니 걱정하지마, 타이렐."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하긴 했어도 멜랑콜리아라는 기억의 병이 만연한 이 공정도시에서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상대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그 사람를 잃어버린다는 것.
이 곳의 사람들은 함부로 마음을 줬다 잊어버릴까, 잊혀질까 두려워 함부로 친해지지도, 사랑을 할 수도 없었다.
리니어스의 그 상냥함은 그런 멜랑콜리아에게 있어 독과 같을지 모른다. 멜랑콜리아가 지워버리는 기억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의 기억이라면 아마 리니어스는 그 상냥함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된 뒤 다시 수 없이 잊혀졌을 것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물론 전부 타이렐의 추측이지만 아주 없을만한 일도 아니다.
그는 이미 멜랑콜리아에 걸려 있는 상태일까. 이런 상냥한 사람이 잊어버리게 된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멜랑콜리아는 한 사람에게 한 번 발병하면 다시 발병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누군가를 잊어버리게 된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을 잊어버릴 수 없다. 자신을 의지했고, 자신이 의지한 상대가 하나 씩 자신을 잊어버려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어떨까. 자신이 멜랑콜리아에 걸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자신이 그 사람에게 부은 애정의 양에 대해 의심을 하진 않았을까. 아, 저 사람이 나에게 할애한 감정의 양 만큼 나는 저 사람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게 후회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C.C.나 타이렐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번 만큼은 잊혀지기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샤워기의 물을 껐다. 남의 과거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다. 망상이 지나쳤다. 설령 그의 추측이 맞다 하더라도 그와는 상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나 리니어스가 서로를 잊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서로를 그 정도까지 소중하게 여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타이렐에게 있어 멜랑콜리아는 큰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급하게 몸에 거품을 묻혀 씻어 냈다. 너무 오랫동안 욕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곳은 자신의 집이 아닌 남의 집이다. 괜한 폐를 끼친게 아닐까 걱정이다. 욕실의 문을 살짝 여니 수건과 잠옷이 놓여 있었다. 물기를 닦고, 수건으로 허리를 감싸고, 분홍빛이 드는 잠옷을 들어 올려보았다. 얼추 사이즈는 맞는 것 같았다. 그런 것보다 이런 건 어디에서 구한 것 일까. 같이 사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둔 것이라면 대단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옷을 갈아입고 욕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리니어스는 베란다에 서서 창 틀에 올려 놓은 작은 화분의 화초가 빗물에 젖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어느 정도 익숙해 진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 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익숙해지는 쪽이 이상한 일인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동시에 무척이나 슬픈 일이 될것이다.
세상은 커다란 태엽시계이고, 자신들은 그것을 이루는 톱니바퀴중 하나라고 생각해오던 타이렐이었다. 아주 작은 부품 하나라도 빠지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타이렐이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삐걱거리긴 해도 문제 없이 잘 돌아가기만 했다. 그랬던 세상이 갑자기 재정비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것이 바로 사건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톱니바퀴가 고장이 난다면, 그것을 교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 그 교체당한 톱니바퀴가 자신이었다는 것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타이렐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그를 볼수도, 기억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투닥거리던 동료도, 마음에 들지 않던 상사도, 뭔가 뒤가 구린일을 하던 관계자들도,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타이렐' 이라는 사람의 존재와 그가 있었던 흔적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가 이뤄낸 얼마 없는 성과들은 전부 다른 사람이나, 우연의 산물로 인한 발견으로 변해있었고, 그가 만든 것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억울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슬픔을 알아 줄 수 있는 것은 본인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투명인간이었다. 벽과 벽 사이를 통과 할 수만 없을 뿐이지, 이 존재감은 그야말로 투명인간이다.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다. 자신은 분명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래선, 그가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조차도 알아낼 방법이 없겠다. 일단 그래도 여러가지 가설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케이오시움에 의한 일 이라는 가설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없다.
아직도 이곳에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니,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사람들이 몰래 실험을 하고 있었기에 그 타깃으로 자신이 선택된 것이 아닌가. 이런 선택따위는 받고싶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곳 저곳, 의심이 가는 곳을 찾아 다녔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이 세계를 조정한 그 사람만큼은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조사를 하는 것은 쉬웠다. 오히려 서두르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없어도 이 세계는 잘 돌아가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처음부터 그가 그 곳에 끼워져있던 톱니바퀴가 아니었던 것 처럼. 오히려 이전, 자신이 있던 과거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아웃사이더. 이곳에서도 존재 할 수 없고 완벽히 사라질 수도 없는 그런 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잭오랜턴 처럼.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자신과 겹쳐보였다. 눈앞에서 아른 거리는 환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저어도, 처량하게 등불을 들고 다니는 자신의 환영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곤한 모양이다. 타이렐은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도 잊을 수 있게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았을텐데. 화가 나는 동시에 무척이나 슬퍼졌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따지고 물어, 이 상황을 해결 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유일한 돌파구가 막힌 기분이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심장은 충분히 젖어있었다. 슬픔의 눈물이기 보다는, 분을 이길 수 없어 땀처럼 맺친 눈물이었다.
성과 없이 그저 같은 곳을 맴돌기만 몇 시간 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무력감에 그가 점점 시들어 갈 때, 누군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타이렐, 여기서 뭐해애?"
이런 상황에도 그닥 반갑지 않은 그 목소리는 그의 상사인 리니어스 상급 엔지니어였다.
어떻게 자신이 보이는 것일까. 왜 하필 자신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인가. 이 사람이 이 상황을 초래한 것인가. 케이오시움의 연구에 손을 댈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타이렐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진 않은 상대다.
"그렇게 보지 말고, 타이렐. 무섭잖아."
"당신이 저를 무서워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가아. 뭐, 사소한 거에 신경쓰지 말고. 아까전의 질문,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나 대답해 줄래애?"
타이렐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 더욱 사소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사의 요구는 웬만해선 거절하지 말자는 것이 타이렐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흐음~ 그렇구나아."
그리고 정적. 리니어스와 타이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사람과 계속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 타이렐이 먼저 등을 돌렸다.
"타이렐."
그가 등을 돌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리니어스가 말했다.
"무슨일이시죠."
"음, 그냥 아무것도 안물어보나 해서. 타이렐 군은 자신이 처한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는 건가. 궁금해진 것 뿐이니까."
"물어볼만한 기력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과 대화하면 그 기력이 더욱 빨려나가는 기분입니다. 당신은 분명히 의심스럽지만 쉽게 물어 볼 수가 없군요. 물어봐도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리니어스는 만면에 미소만을 가득 띄우고 있다.
"타이렐은 뭔가, 나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마. 오히려 너에게 있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구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당신이 꾸민 일입니까?"
이런 것이 무엇인지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타이렐은 그가 모든 것을 꾸몄다는 확신 아래, 그렇게 말했다.
"꾸몄다니, 그런 악당같은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단지 지금은 조정 중 일 뿐이니까아."
세상이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이야기를 처음에 말했었지. 리니어스가 타이렐의 마음을 읽는 듯이 말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톱니바퀴라고 한다면, 타이렐은 바로 그 세상에 초대 받지 않은 부품이었다. 처음부터 이 기계에 끼워질 수 없는 부품 중 하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존재였을 수도 있고,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던 사람 일 수도 있다. 리니어스는 그 부품을 주워 어떻게든 이 시계에 끼워넣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왜 그라는 존재에 눈을 뗄 수 없었는지. 단순히 미지의 존재에 대한 탐구 정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리니어스가 원래는 있을리가 없는 존재를 세계에 존재시키고, 그 이후로는 계속 그가 그를 이 곳에 있게 했다. 그가 있기에 타이렐이 존재했다. 타이렐이 기억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이 현상은 그에게 몇번이고 일어났던 일이었다. 항상 옳음을 추구하던 타이렐이지만 그라는 존재 자체는 불안정 그 자체기에, 몇번이고 지금과 같은 조정기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항상 조정기간이 끝나면 그 동안에 있던 일은 하룻밤 꿈처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걸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 없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습지도 않는 장난은 그만해 주세요."
"믿지 않아도 타이렐에게는 큰 영향은 없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어. 너에게는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고. 어차피 금새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 될 테니까."
리니어스는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타이렐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바로 내가 그걸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 계속 너를 붙잡고 있는 거지만."
또 다시 생각을 읽는 듯한 말투로, 리니어스가 대답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타이렐을 독점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둘 만의 시간이네. 기념비적이야."
연극의 오프닝 멘트 같은 과장된 어투로 그가 말한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파악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그런 시간은 평생 주어지지 않겠지.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 타이렐."
리니어스의 목소리와 함께, 괘종시계의 울림소리가 들렸다. 아침 9시를 알리는 시계의 소리였다.
요즘과 같은 세상에 이렇게 손편지를 쓰는 것은 비교적 생소한 일이다. 바로 그만해도, 우편함에 도착하는 것은 손편지가 아니라 휴대전화 요금이나 관리비 청구서 같은 무엇인가 나에게 요구를 하는 종이들이 전부니까. 휴대전화나 컴퓨터의 딱딱한 자판만 만지다가, 이렇게 펜을 쥐게 되니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메일이나 문자보다는 이렇게 펜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이것은 보내기 위한 용도가 아닌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용도였으니까. 만약에 이것을 보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까 말한 청구서 더미에 섞여 버려질 것 같았다. 무라사키바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러가 아니라 실수라고 해도. 일단 편지나 문자를 보내게 되면 그 답장을 기다리게 되니까. 그런 가망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문장을 적고, 소리내어 아츠시, 하고 불러보았다. 얼마만에 불러보는 이름일까. 자신 목소리인데도 그것이 꽤 어색했다. 의외로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학교에 나가지 않은 주말 며칠이 고작이다. 끔찍이 긴 시간동안 그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츠시에 대한 시간은, 언제나 그것의 몇 배로 느껴지곤 했다. 즐거운 시간도, 괴로운 시간도. 몇 배 씩. 언제나 느릿느릿한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인 것일까.
정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아츠시에 대한 감정이었다.
분명히, 그 한 학년 후배에 대한 그의 감정은 좋아한다, 라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정리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접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불을 개듯이 반듯반듯하게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지. 무작정 그의 앞에 다가가 좋아합니다! 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일이니까. 본인에게도 그것은 약간 힘든일이다. 이상하게 연애에 관련된 문제가 되면 소녀가 되어버리는 히무로 타츠야였다.
일단은 좋아합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런 내용을 적어버리면 이 편지는 연애 편지가 되어버리는 거잖아. 그런 편지를 받는다면, 아니 안보낼 거지만, 무라사키바라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바보같다고 하며 비웃을까. 아니면 이 편지의 의미도 알지 못할까. 설마 그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이를 먹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염소도 아니고 그럴일은 없겠지.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무라사키바라에 대한 연심의 시작은 뻔한 연애소설의 줄거리 답게 첫눈에 반한 것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히무로는 생각했다. 아, 세상에 천사라는게 있긴 있었구나. 분명 그때는 그랬다.
농구부에서 활동을 하고 난 후에는, 그 환상이 깨졌다. 이녀석은 악마다. 악마임이 틀림없었다. 재능이 없으면 그만두라니, 지옥에 떨어져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죄인의 기분이 이랬을까. 재능없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비슷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저런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된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에 대해서는 꽤 오랫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더블에이스라고 인정까지 받은 몸이라 봐주고 있었던 것일까.
"무로칭은 말이지,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단 말이지."
항상 어린아이같은 행동을하는 후배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라사키바라 쪽이 오히려 더 손이 많이가는 어린아이다. 그런 후배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히무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뭔가 알수 없는 기쁨도 생겼다.
"역시 아츠시도 나를 신경 써 주고 있었구나! 이건 역시 운명의 destiny! 라는 걸까! That's awesome!"
"... 무로칭은 미국에서 살다 왔는데 영어가 수상하단 말이야..."
이런 느낌으로 관계를 이어오던 것이 근 수개월간이었다. 그렇게 이어져 오던 관계를 먼저 기우뚱하게 해버린 것은 무라사키바라였다. 히무로에겐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로칭, 혹시 나 좋아해?"
시기적으로는, 아마 윈터컵이 끝나고 난 뒤, 아직까지 그에게 무라사키바라에대한 연심이 확실하지 않을 때의 일이다. 히무로의 무라사키바라에 대한 연심은, 그말을 기점으로 부풀어 오른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때는 극구 부인했다. 평소에 잘 쓰려하지 않는 제스쳐까지 내 보이며.
"그럼 뭐, 그런거고."
무라사키바라는 그렇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다. 방과 후에는 그에게 과자 한봉지를 얻어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말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은 히무로 하나 뿐이었다. 무라사키바라가 그에게 그런말을 한 그 순간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결과는 현재, 이렇게 연애편지 아닌 연애편지를 적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남자 녀석이 답지않게 종이 한 장 붙잡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여러번 고개를 저으며, 그만두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손이 멈추질 않았다. 마음이 복잡한 탓이다. 어쩔 수가 없다. 편지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요즘 안부. 과자는 잘 먹고 있냐. 편의점에 새 과자가 나왔다더라. 비싼데 가끔은 네가 사먹어라. 의미도 알 수 없고 두서도 없는 이야기였다. 왜 이런 휴지 조각을 생산해 냈는지 모르겠다. 후회의 감정에, 뜻 모를 눈물까지 난다. 졸지에 이 종이는 쓸데없는 내용의 눈물 젖은 편지가 되어버렸다. 보여주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 이런 그냥 말로 해도 되는 것을 글로 쓴 것에 대해 무라사키바라는 비웃거나, 무시하거나, 바보 취급을 하겠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 이 편지는 몸에 지니고 다니자. 액땜이 부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한 히무로는, 오전부터 무라사키바라와 마주치게 되었다.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를 보자마자, 말을 걸었다.
"무로칭."
"어어어어어어어어??? 무슨 일이야 아츠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그런 히무로를 보고, 무로칭 이상하네. 라고 한마디 한뒤, 본론을 이야기 했다.
"학교 끝나고 케이크 뷔페가자."
겨우 그것뿐이었다.
"아, 난 또 뭐라고."
히무로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야, 이런 편지에 대해서 무라사키바라가 알 리도 없고, 안다 해도 그렇게 찔릴만한 일은 아니니까. 좋아한다라는 마음을 고백할 마음이 없다면, 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일단은 고백하기에 필요한 용기도 없고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고백을 할 때 당연히 드는 고민, 상대방이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한 몫했다.
"대체 뭘 생각한거야. 어쨌든 약속한 거니까. 꼭 나와. 무로칭 오늘 청소 해야했던가. 그럼 역 앞에서 기다릴게."
왠지 모르게 히무로의 일정을 궤뚫고 있는 무라사키바라였다.
불안한 느낌은 들었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히무로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늘은 부 활동이 없는 날 이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아마, 수업이 끝나자마자 역 앞으로 가 히무로를 기다리겠지. 그렇다면 히무로는 그를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맡은 일을 다 마치고, 역으로 가는 것이 맞는 일 이다. 역으로 가면 그가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늦었다며 불평을 쏟아놓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무라사키바라를 달래며, 케이크 뷔페에 가는 것이다. 음, 좋아. 완벽해. 완벽한 일상의 한 페이지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렇게 상상대로만 풀릴리가 없는 일이었다.